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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다시, 봄
낰낰 (@jj_hq_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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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낰낰입니다! 「그 계절이 부르던 사랑」 합작을 참여하면서 간만에 아츠키타를 쓰게 되었네요! 너무 오랜만이라 정말 즐거웠어요ㅎㅎㅎㅎ 게다가 처음으로! 컬러 버스 세계관에 도전하며 호기롭게 네 계절을 전부 선택해 글을 써 보았 습니다!! (욕심쟁이ㅎㅎ) 덕분에 분량 조절을 실패했네요 흑... 게다가 계절별로 분위기를 정하고 쓴지라 어쩔 수 없이 급전개가 된듯해 많이 아쉽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 그래도 열심히 썼으니 즐겁게 읽어주신다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ㅎㅎ 그럼 지금까지 제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 모두 수고 많으셨고 감사합니다!!
*컬러 버스 세계관으로, 저만의 설정도 들어가 있습니다.
*각 BGM들은 반복 재생 후, 다음 BGM을 틀기 전에 멈추시는 걸 권장합니다!)
(pc에서는 제공되지 않는 기능이므로 곡 이름만 써놓겠습니다.)
(모바일 버전에서는 기기의 차이로 BGM의 위치가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봄🌱 BGM (Hurts - Boyfriend (Official Audio))
온 세상이 벚꽃으로 물들었다. 어딜 가도 작은 꽃잎이 살랑살랑 떨어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봄을 맞이하며 즐거워했다. 그 안에서, 미야 아츠무 만이 봄을 몰랐다.
“뭐가 그리 예쁘다고 난리들이고.”
심술궂은 한마디를 툭 뱉고 고개를 내렸다. 시야에 들어온 회색의 아스팔트 바닥이 그에게 보이는 온전한 세계였다. 미야 아츠무는, 색을 몰랐다.
이 세상에는 아주 드물게 색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어났다. 색각이상이나 색맹과는 다르게 운명의 상대, 즉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만 색이 보이기 시작한다. 과학적으로도 의학적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현상. 병이라고 지칭하기도 어려운 이 현상의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고, 늘 의학계에서 뜨거운 감자로 대두되었다.
그리고 미야 아츠무는 아주아주 드물게 태어나는 ‘색상 인식 불능자’였다. 그의 세상은 태어났을 때부터 흰색과 회색, 검은색이 다였다. 오직 무채색으로만 이루어진 세상을 살면서 매번 머리 색을 굳이 인지하지도 못할 금발로 물들이는 것은, 그에게 있어선 하나의 오기였다. 빌어먹을 색깔 따위 언젠간 보고야 말겠다고.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만의 고집이었다.
가끔 미용실에서 사기를 당할 때면 득달같이 찾아와 깽판을 부려줄 정상인 쌍둥이도 있겠다, 그는 늘 주기적으로 머리를 탈색했다. 그런 아츠무를 위해 오사무는 굳이 제 머리를 회색으로 염색하며 아츠무의 눈에 보일 그의 머리 색을 자신에게도 물들였다.
“어떻노.”
“오늘도 빌어먹게 밝은 회색이다. 니도 회색이가.”
“어. 내도 회색이다. 이제 집에 가서 밥 묵자.”
“그래. 오늘 메뉴는 무조건 빨간 거다.
“쯧, 고집은.”
색깔이 보이지 않아 짜증이 날 땐, 화풀이 식으로 부러 빨갛다는 음식만 찾아 먹는 것도 아츠무만의 고집 중 하나였다. 맵든 안 맵든 무조건 빨갛다고 알려진 음식을 먹어야 했다. 설령 그렇지 않은 음식을 빨갛다고 속이고 먹인다면,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켰기에 그의 가족들은 두 손 두 발 다 든 지 오래였다.
“으아- 빌어먹을 봄! 봄이 뭐가 그래 좋은 긴데!!”
발작적으로 외친 짜증스러운 한탄에 벚꽃 아래를 삼삼오오 지나가던 커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보기엔 솔로라서 괜한 꼬장을 부리는 거라 느껴질 법도 했다. 물론 솔로인 건 맞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전히 이 세상이 이리 무채색일 순 없었으니까.
“입 안 닥치나.”
“니도 똑같다! 봄이 그렇게 핑크빛이가! 그래서 핑크빛은 뭔 색인데 시발!!”
“안 싸 물면 처맞을 줄 알아라.”
안쓰럽긴 하나 쪽팔린 게 먼저인 오사무가 미간을 찌푸리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입을 삐죽 내민 아츠무는 툴툴거리며 더 땡깡을 부리다가 결국 한 대 맞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빨리 집에나 가고 싶었다.
횡단보도 앞에 멈춰선 아츠무는 건너편에 서 있는 예쁘장한 남자의 특이한 머리칼을 보고 평소처럼 무심히 물었다.
“저 남자는 머리가 투 톤이가. 위는 허옇고 아래는 까만 것이 염색을 특이하게 했네. 뭔 색이고.”
“위는 하얀색, 중간은 회색, 아래는 까만색.”
마찬가지로 익숙하게 대답한 오사무의 말에 아츠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라데이션을 넣은 것 같은 머리라 당연히 화려한 색인 줄 알았건만 제 눈에 보이는 그대로라니. 사람들의 머리가 가지각색인 세상에서 이런 경우는 흔치 않았기에 단번에 호기심이 생겼다.
“진짜 내가 보는 거랑 같나?!”
“응.”
“눈 색은? 눈썹이랑 눈동자 다 깜장으로 보이는데 맞나.”
“그것도 맞다.”
신기하네. 아츠무는 신호가 바뀌고 횡단보도를 건너며, 남자가 제 옆을 지나치는 그 순간까지도 시선을 고정하고는 빤히 쳐다봤다. 남자는 누군가 자신을 뚫어지라 응시하고 있음에도 관심조차 주지 않고 쌩하니 무시했다. 그런 반응 또한 특이했다.
거참 특이한 인간일세- 물론 이 세상에서 그보단 특이한 사람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대로 스쳐 지나갈 뻔했던 단순한 호기심이 관심으로 바뀐 것은, 개강 첫날 들어간 전공 강의실에서 그 남자를 다시 마주치게 되면서부터였다.
“키타! 니 이번에 복학했나!”
“어. 이번 학기부터 다시 다니게 됐다.”
“워킹홀리데이는 잘 다녀왔나.”
“잘 다녀왔다.”
그 특이한 남자는 이제 2학년이 된 아츠무보다 한 학번 위인 복학생이었다. 아츠무는 깜짝 놀라며 키타라고 불린 남자를 또다시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곤 제 옆에 앉아 핸드폰만 만지고 있는 스나 린타로에게 물었다.
“니 저 사람 아나.”
“누구. 키타 선배님?”
“어? 니 우예 아노!”
“방학 때 동아리 나갔다가 안면 텄어.”
동아리?! 아츠무가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남자의 눈길이 잠시 이쪽을 향했으나 금세 관심 없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에 뭔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며, 아츠무는 대부분이 친한 과 사람들에게 헤헤 웃어준 뒤 다시 스나에게 물었다.
“설마 우리 동아리가.”
“그건 아니고, 아카기 선배랑 동기셔서 몇 번 오셨었어. 넌 방학 내내 쳐 노시느라 몰랐겠지만.”
들어보니 키타 신스케는 꽤나 유명한 인사였다. 학점 우수, 인성 우수, 외모 우수. 조금 과하게 철저하고 선 긋는 게 흠이라지만 아츠무에게는 그조차 매력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존재하지? 매일 놀러 나다닐 생각만 하던 그와는 너무나 다른 세상의 인간이었다.
아츠무는 괜스레 방학 때 늘어지게 게으름이나 피운 스스로를 원망했다. 그리곤 여전히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키타의 단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이제부턴 꾸준히 눈도장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는 학교생활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천지가 개벽할 다짐을 하기도 했다.
그가 안 하던 짓을 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뿐이었다. 왠지, 저 선배와 아주아주 친해지고 싶어졌다.
여름☀ BGM (Carly Rae Jepsen - I Really Like You)
“안녕하세요 키타 상!”
“그래.”
키타 신스케는 처음부터 제멋대로, 무려 선배 소리도 지우고 친근하게 굴어오는 아츠무에게 꽤나 관대하게 대해주었다. 남들은 그 차분한 눈동자를 보고만 있어도 기가 죽어 사린다는데, 사회체육과의 다시없을 탕아 미야 아츠무는 거칠 것 없다는 듯 마음대로 행동했다. 겁 없는 2학년의 행보와 예상치 못한 키타의 반응에 과가 떠들썩하게 뒤집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모두의 경악을 뒤로하고 틈만 나면 찾아가 치댄 것이 벌써 3달째다. 어느새 여름의 초입이 되어 기말고사 시즌이 다가왔고, 과 내에서 미야 아츠무와 키타 신스케가 함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아츠무를 잡으려면 키타에게 연락하라는 말이 매뉴얼처럼 퍼질 정도였다.
“키타 상, 교양 기말과제 어디서 하실 거예요? 저도 끼워주시믄 안 되예?”
“또 스나한테 버려졌나.”
아츠무는 개강 첫날 키타를 만난 후, 곧바로 수강 정정 기간에 그를 따라 교양 하나를 신청했었다. 일명 헬강으로 통하는 ‘사진학의 이해’였는데, 말 그대로 사진에 대해 배우는 교양이라 과제 및 모든 시험이 직접 찍은 사진을 제출하는 것으로 대체 되었다. 평범한 학생들도 점수 받기 어려운 강의였건만 ‘무려 색상 인식 불능자’인 아츠무에겐 어떻겠는가. 원래는 졸업할 때까지 영원히 그의 고려대상에 끼지도 않았을 교양이었다.
그런 수업을, 단지 키타가 혼자 듣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앞뒤 재지 않고 대책 없이 그냥 수강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기함할 헛짓거리의 희생양은 오티 첫날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다가 친구로 엮어버린 죄 없는 동기, 스나 린타로였다.
‘아니 색깔도 안 보이면서 사진은 어떻게 찍을 건데 미친놈아.’
‘색이 안 보이지, 눈이 안 보이나. 구도만 잘 잡으면 된다! 그니까 같이 좀 들어주라, 응?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너 진짜 도라이야? 그 선배 좋아해?’
‘뭐라카노! 단지 친해지고 싶은 순수한 마음을 폄하하지 마라!’
이미 공공연한 그의 마음은 한평생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 없는 아츠무 자신만 몰랐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스나는 3일간 지속된 징징거림 공격에 끝내 백기를 들고 말았다.
수업은 예상했던 대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2주에 한 번씩 제출해야 하는 사진 과제는 매번 주제가 달랐고, 사진의 ‘사’자도 모르는 아츠무는 늘 고통받으며 키타와 스나를 귀찮게 했다. 물론 스나는 애초부터 아츠무의 목적을 알고 있었으므로 학기 초반부터 빠르게 그를 손절 쳤다.
‘너랑 같이 과제 해줄 마음 뒤졌다 깨어나도 없으니까 키타 선배님한테나 가던가.’
결국, 아츠무는 홀로 남아 과제를 진행하다 도저히 못 하겠다고 울먹이며 키타를 찾아갔다. 다행히 키타 신스케는 무채색의 세상을 살며 혼자 고생하는 과 후배를 외면하지는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렇게 아츠무는 제 본래의 계획대로 키타와 가까워지는 것에 성공할 수 있었다.
“금마가 지랑은 평생 안 한다는데 어쩌겠습니꺼…. 이번에도 착하고 예쁘고 멋있고 존경하는 키타 상이 저 좀 구제해 주시믄 안 될까예? 네?!”
“그럼 마지막 촬영이니까 단디 준비해야 한다.”
열심히 하겠습니더! 활짝 웃으며 외친 아츠무가 키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머리를 부볐다. 마치 커다란 강아지가 치대는 듯한 모양새에 지나가던 동기들이 토 나오는 시늉을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으으- 이중인격 새끼. 아츠무의 유별난 키타 사랑은 이미 과 내에서 학번을 막론하고 유명했다.
“알았다. 먼저 과방에 가 있어라. 내는 교수님 연구실 들렀다 갈 끼다.”
아츠무의 부들부들한 머리칼을 한번 쓰다듬어 준 키타의 얼굴은 여전히 무심하고 덤덤했다. 그러나 머리에 닿아온 손길이 다정하고 부드러워, 아츠무는 베시시 웃으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호기심으로 시작된 선후배 관계가 어느새 ‘능력 있는 탑 클래스 조련사 주인’과 ‘주인 말만 잘 듣는 강아지’로 변모해 있었다.
***
“오늘 날씨 쥑이네예! 구름도 없고 쨍쨍한 게 사진 예쁘게 나올 거 같은데요?!”
“그러네.”
카메라를 이리저리 조작하던 키타가 삼각대를 어깨에 메고 즐거이 떠드는 아츠무를 향해 옅게 웃어주었다. 키타에겐 새파란 하늘이, 그에겐 옅은 회색으로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맑은 얼굴로 날씨를 논할 수 있는 아츠무가 참으로 대견하게 느껴졌다. 타인에게 선을 긋고 다정하게 벽을 세우는 키타가 아츠무 만큼은 너그러이 받아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뭐랄까, 험난한 세상을 씩씩하게 살아가는 소녀 가장 캔디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이리 와, 기말고사 과제 주제가 새로움이니까 오늘은 색다른 걸 찍어보자.”
“예!”
평소라면 오지 않았을 자연 가득한 근린공원 안에서 아츠무는 키타를 따라 발을 내디뎠다. 사실 그는 봄에 피는 벚꽃을 비롯해 이러한 자연경관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소음 가득한 도시의 네모난 건물들과 삭막한 아스팔트 길이 더 좋았다. 그쪽이 그에게는 좀 더 진실된 세상이었으니까. 이런 다양한 색채가 가득한 자연은 어차피 보지도 못하는 아츠무에게 그저 고통만 줄 뿐이었다.
그럼에도 오늘의 아츠무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단지 키타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이곳이 어디인지, 어떤 색을 가지고 있는지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우거진 수풀 사이를 지나치며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릴 뿐이었다.
“이쯤이 좋겠다.”
“오, 나비도 많은데예! 저 나비는 무슨 색깔입니꺼.”
“저건 노랑.”
“쟤는요?”
“가는 파랑.”
“이야 이쁘겠네예-”
아이를 가르치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하나하나 물어보며 광대가 뽈록 솟도록 예쁘게 웃는 아츠무는 진실로 즐거워 보였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서 낮게 웃은 키타가 손을 올려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떨떨한 낯으로 얼굴을 붉힌 아츠무는 곧 베시시 웃으며 떨어지려는 그의 손을 잡아 다시 제 머리에 비볐다.
키타는 단정한 눈매를 휘며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애교부리는 강아지에게 약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하는 어울리지 않는 자기 합리화를 펼치며 가만히 손을 내어주었다. 온통 푸르게 물든 초록빛 숲에서, 찬란한 금발을 흐트러뜨리며 웃는 아츠무의 모습은 가히 작품이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아츠무 스스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아츠무.”
“예?”
머리를 타고 내려온 손이 아츠무의 뺨을 한번 쓸고 떨어져 나갔다.
“저기 서 봐라.”
“어…. 여기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아츠무는 키타의 지시에 의아한 얼굴을 하며 숲 가운데에 어정쩡하게 섰다. 그러자 척척 삼각대를 설치하고 카메라를 얹은 키타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웃어봐라.”
“...예? 저 키타 상, 그, 어, 저 찍으시는 거예요?”
“그래. 그니까 함 웃어봐라.”
갑작스러운 요구에 아츠무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볼을 긁적였다. 의식해서 부러 웃음을 지어본 적은 없는지라 무척이나 어색했다. 자꾸 로봇처럼 딱딱한 미소만 짓는 바람에 아까의 느낌이 나오질 않아 답답해진 키타가 도움을 주었다.
“생각만 해도 웃음 나올 정도로 좋아하는 거를 떠올려 봐라.”
“좋아하는 거요?”
“그래. 음식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사람이든.”
아츠무는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뱉는 키타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얼굴에 오목조목 들어찬 이목구비가 어여뻤고, 오물오물 움직이는 통통한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그를 둘러싼 배경은 온통 무채색이었으나 그럼에도 더없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키타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 예쁘다 키타 상.
찰칵-
그 순간, 날카로운 셔터음이 울리며 아츠무의 몽롱하던 정신을 번쩍 깨웠다. 어? 내 지금 뭐라 캤노…. 그는 의식하지 못한 새에 벌어진 일들에 깜짝 놀라며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런 아츠무를 향해 카메라를 들고 다가온 키타가 사진을 보여주며 뿌듯하게 웃었다.
“봐라, 사진 윽수로 잘 나왔다. 내는 이걸로 과제 낼란다.”
“예, 예?”
사진 속의 아츠무는 정말로 빛이 나게 웃고 있었다. 색은 잘 모르겠지만, 주변에 어우러진 풍경과 작은 나비들이 사이에 선 그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아츠무는 우두커니 서서 멍청히 제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향해 키타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이래 예쁘게 웃었노.”
“지, 지는…. 그냥….”
키타 상 생각했는데예…. 나직하게 읊어진 말이 둘 사이에 몽실하게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침묵이 찾아왔고, 눈을 동그랗게 뜬 키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스스로 뱉어놓고도 당황한 아츠무의 동공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게,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예, 그게요…!
“그건, 내를 좋아한다는 말이가.”
인정사정없이 날아온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얼른 아니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아츠무는 제 이상행동에 땀을 삐질 흘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 그를 향해 키타가 다시금 물었다.
“그거 고백이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오만가지 생각들이 단숨에 사라졌다. 새하얘진 뇌리에 오직 한 가지만이 떠올랐다. 여태까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무언가의 정체였다. 내가…. 지금껏 키타 상을 따라다녔던 게…. 그냥 친해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한번 깨닫고 나니 이제야 눈치챈 그 감정은 걷잡을 수 없어 커져 아츠무의 온몸을 두드렸다. 심장박동이 비정상적으로 올라갔고,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그, 그런가 봐요…. 조, 좋아, 지가, 키타 상을, 좋아하나 봐요….”
세상에서 제일로 멋없는 고백이 어물거리며 바보같이 뱉어졌다. 그러나 키타는 개의치 않고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사귈까.”
“.......”
질색하며 피하지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했건만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츠무는 입을 떡 벌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여전히 단정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를 바라봐주는 까만 눈은 차분하게 빛나며 이것이 진실로 현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츠무는 뭐라 말도 못 하고 그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 조, 좋아요!!!”
그때, 온몸의 털이 삐죽 서는 느낌과 함께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물감이 퍼지듯, 온 세상이 갖가지 현란한 색으로 천천히 물들고 있었다. 처음 목격하는 색깔의 향연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아츠무는 그를 덮쳐오는 현기증에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뜨자, 180도 달라지 세상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 어어…! 색깔이…. 색깔이 보입니더!”
기적이었다. 아츠무는 제 눈앞에 보이는 새로운 세상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한 여름은 온통 초록으로 빛나 눈이 부셨다. 아, 이런 모습이었구나. 눈꺼풀 위를 덮고 있던 베일이 벗겨진 기분에 상쾌하기까지 했다.
아츠무는 한참을 넋 놓고 여기저기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손을 잡아끈 키타가 숲 밖으로 아츠무를 이끌었다. 공원 밖 도롯가에 선 둘은 늘 봐오던 평범한 마을 풍경을 새삼스레 응시했다. 매일 같이 지나다니던 동네를 충격받은 얼굴로 훑은 아츠무가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이게, 이게 진짜 모습….”
“그래. 이게 본래의 세상이다. 이제 보이나.”
“예. 보입니더. 이제는 보입니더.”
떨리는 목소리로 답한 그가 눈물이 고인 눈가를 손으로 가리며, 습관처럼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회색의 아스팔트가 보였지만 그 또한 이전까지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아스팔트의 갈라진 바닥을 뚫고 자라난 새싹들과 가장자리에 피어있는 작은 야생화들이 다양한 색깔로 무채색 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다른 세상에 떨어진 기분을 느끼던 아츠무가 이윽고 키타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세상에서의 키타는 여전히 익숙한 무채색에, 살 색과 분홍색이라는 낯선 빛깔 딱 둘만이 더해져 있었다. 알 수 없는 감동이 벅차올랐다. 울컥 치미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아츠무가 단숨에 키타를 끌어안았다. 조용히 그를 마주 안아준 키타는 이내 훌쩍거리기 시작한 아츠무의 등을 다정하게 도닥였다.
세상이 생기를 머금고 가장 화창해지는 어느 여름날의 하루였다.
가을🍁 BGM (Juliana Chahayed - Save A Little Bit)
모든 것이 무르익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계절이 찾아왔다. 새로운 학기 또한 금세 시작되어 벌써 9월 말에 이르렀다. 아츠무는 매일 등교하기 전, 액자에 끼워 둔 사진 두 장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지난 학기 교양에서 당당히 A+을 받았던 자신의 작품 <평범한 동네>와 마찬가지로 A+을 받은 키타의 <숲속의 연인>이었다.
“아 보고 싶다-”
매일 봐도 매 순간 보고 싶은 연인을 떠올리며, 아츠무는 행복하게 집을 나섰다.
와 오늘 날씨 쥑이네- 가을이라 한층 더 높아진 하늘이 오늘따라 유독 새파랬다. 아츠무는 기분 좋게 하늘을 바라보며 선선해진 바람을 맞았다. 매번 새로운 색을 보며 감탄하고 감동하던 게 요즘 들어서는 꽤 줄어들었다. 인간의 적응력은 어찌나 빠른지, 20년을 무채색으로 살아왔던 아츠무는 고작 석 달 사이 컬러풀한 세상에 완전히 익숙해졌다. 이제는 거울을 볼 때마다 비치는 제 금색 머리칼에도 흠칫흠칫 놀라지 않았다.
“키타 상!”
“왔나.”
계절이 무르익은 만큼 아츠무와 키타의 사랑도 따듯한 빛깔로 무르익었다. 첫 연애라 어찌할 줄 모르던 초반과 달리, 이제는 조금 더 노련하게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고 행동할 줄 알았다. 오늘처럼 이렇게 키타의 입매가 유난히 뻣뻣한 날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이므로 애교를 부려주어야 했다.
“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와 이랍니꺼- 누가 괴롭혔어요! 내가 다 혼내줘야겠네!”
와락 껴안고 호들갑을 떨며 머리칼에 쪽쪽 입을 맞추자 아래에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케이 성공! 이어 부드럽게 아츠무를 밀어낸 키타가 그와 눈을 맞추고는 다정하게 풀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이다. 밥은 뭇나.”
“아직예. 키타 상이랑 먹을라고 일찍 나왔는데예.”
“내 시간 안 됐으면 우얄라고 말도 없이 그냥 왔노. 다음부터는 연락하고 와라.”
“예에- 그래서 같이 안 먹어줄 겁니꺼?”
키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절대 놔줄 생각 없다는 것을 피력하며 깍지까지 껴오는데 어찌하겠는가. 욕심 많은 연하 애인의 손을 마주 잡아주며, 그는 이번에도 져주었다.
“뭐 묵고 싶노.”
“음, 키타 상?”
“장난치지 말고.”
“헤헤- 장난은 아니지만, 뭐든 좋습니더!”
마냥 행복해 보이는 아츠무를 보니 근심 걱정이 전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키타는 그를 이끌어 학교 밖으로 나서며,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복잡한 생각은 잠시 묻어두기로 했다. 자꾸만 놀아달라고 시도 때도 없이 엉겨오는 강아지가 지나치게 귀여운 탓이었다.
***
수많은 실기와 연습 일정 사이에서 어렵게 잡은 데이트 날이 다가왔다. 아츠무가 학수고대하던 ‘단풍놀이’를 가기로 한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난 아츠무는 설렘 가득한 콧노래를 부르며 잔뜩 꾸몄다. 키타가 예쁘다고 해주었던 맨투맨을 입고, 키타가 잘 어울린다고 해주었던 청바지를 입고, 머리를 공들여 손질한 뒤 조르고 졸라 맞춘 커플 신발을 신었다.
“좋냐.”
“뒤지게 좋다.”
꼴 보기 싫다며 오사무가 혀를 차도 아츠무는 마냥 좋다고 웃었다. 그런 제 쌍둥이를 바라보던 오사무도 결국은 픽 웃음을 흘렸다. 아츠무의 시각이 정상으로 되돌아온 순간부터 그의 가족은 하루하루를 기쁨 속에서 살았다. 그들에게 이러한 행복을 안겨다 준 키타는 미야가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손을 맞잡고 찾아간 곳은 단풍으로 유명한 신사 근처의 가로수 길이었다. 온 거리가 나뭇잎들로 알록달록했다. 노란색의 은행나무, 빨간색의 단풍나무. 시야를 어지럽히는 화려함에 아츠무는 넋을 놓았다. 사진으로만 보는 것과 실제의 풍경을 직접 보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게 대체…. 원래 이런 느낌이었습니꺼.”
“예쁘제- 맘에 드나.”
아츠무는 입술을 앙다물고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으로 키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익숙한 무채색의 머리를 한 그의 연인이, 예쁘게 미소지으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태어나 본 모든 것 중에 가장 예쁘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예. 이쁩니더.”
어떻게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었을까. 키타 신스케는 아츠무의 삶에 한 줄기 빛이자 다시 없을 선물이었다. 그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가져다준 유일한 사람. 더없이 귀하고 소중해서, 벅차오르는 마음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키타 상이 세상에서 제일 예쁩니더.”
“...와 이카노.”
무뚝뚝한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것조차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아츠무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가리는 키타를 붙잡아 와락 끌어안고 크게 소리쳤다.
“아! 키타 상 너무 좋아요! 너무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습니더!!”
“조, 조용히 안 하나…!”
그 키타가 당황하며 말을 더듬을 정도로 커다란 외침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전부 무슨 일인가 하며 그들을 바라보았고, 몇몇 젊은 남녀들은 둘을 보며 꺄르르 웃어댔다.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 또한 흐뭇하게 웃으며 청춘이네- 하고 농담을 던졌다. 이런 유의 주목을 받아본 적이 없는 키타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아츠무의 팔뚝을 퍽퍽 내리치며 버둥댔다.
“공공장소에서 와 이라노. 이거 안 놓나!”
“싫은데예- 키타 상 제 꺼라고 온 세상 사람들한테 전부 알릴 겁니더!”
조금도 밀려나 주지 않은 아츠무가 외려 더 세게 껴안으며 그의 목덜미에 제 머리를 부벼댔다. 결국 키타는 그 넘쳐흐르는 애정을 이기지 못하고 얌전히 안겨주어야만 했다. 하여튼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기로는 세계 일등이었다.
“알겠으니까 힘 쫌 풀어라.”
가만가만 제 머리칼을 쓰다듬어 오는 손길에 아츠무가 헤실헤실 웃었다. 그는 키타의 이런 점도 너무나 좋았다. 그를 나무라다가도 아츠무가 고집부리면 결국 그 억지를 들어주며 져주는 다정함. 이럴 때마다 그의 애정을 확인받는 듯해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실로 유치하지만, 저 또한 그에게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 같았다.
“키스해도 됩니꺼.”
“...진심이가. 여서?”
“예.”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힌 키타가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냥 좋다고 샐샐 웃고 있는 아츠무의 입술을 꼬집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그러나 반짝이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마치 꼬리라도 흔드는 것처럼 조르는 모양새를 보면 자꾸만 마음이 약해졌다. 키타는 결국 타협에 들어가기로 했다.
쪽-
꽃을 찾아 내려앉은 나비처럼, 가벼운 입맞춤이 아츠무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사실 진짜로 해줄 줄은 몰랐던 아츠무가 깜짝 놀라며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키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부드럽게 풀린 얼굴을 한 키타가 옅게 웃으며 그를 달랬다.
“여기서는 이까지만. 나머지는 이따 둘만 있을 때 하자.”
“아, 아 진짜, 아, 진짜 키타 상 너무 좋아요! 사랑해!!”
또 한 번 주변의 이목을 잡아끄는 소란이 일어났다. 다시금 창피함이 몰려온 키타가 황급히 뒤 돌아 도망가기 시작했다. 아츠무는 얼른 그의 뒤를 따라잡으며 방정맞게 물어댔다. 나머지요? 나머지 뭐요? 응? 이따 언제요? 어디서? 응? 귀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키타를 짓궂게 놀리며 더없이 즐겁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매 순간 그가 더 좋아져서 큰일이었다.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이 마음은 도저히 감당이 되질 않았다. 마음 같아선 주머니에 숨겨두고 그 혼자만 보고 싶을 정도로 키타를 독점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의 인생에 찾아온 이 기적 같은 사람을, 아츠무는 평생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모든 게 제 생각처럼 순탄하게 흘러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겨울❄ BGM(Etham Basden - Leaving The Lights On)
모든 걸 얼려버리는 차디찬 계절이 다가왔다. 언제나 뜨겁기만 할 것 같았던 키타와 아츠무에게도 여지없이 겨울은 찾아왔다. 자비 없는 찬 바람이 모두의 살갗을 괴롭히다, 마침내 마음마저 시리게 파고들었다.
“오늘도 싸웠나.”
“미쳐 불겠다 진짜.”
그걸, 과연 싸움이라고 칭할 수나 있을까. 아츠무는 괜스레 제 머리를 헤집어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12월 들어 부쩍 다툼이 잦아지더니, 겨울 학기의 마지막 달인 1월에 와서는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종종 생겨나고 있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툼이라기보단 아츠무의 일방적인 다그침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실 그것은 어린아이의 생떼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기분이 상해온 건지, 안 봐도 알 것 같은 오사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는 덤덤한 어조로 여전히 씩씩대고 있는 아츠무를 타박했다.
“그러게 적당히 하라 안 했나.”
“질투가 나는데 우야노 그라믄!”
“키타 상도 사람인데 사회 활동은 해야 할 거 아이가. 구속도 엥간치 해라.”
“내가 은제 구속했는데!”
원래도 많은 것이 결여되어 있는 녀석이라 걱정이 되었건만 역시나 아츠무는 가장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남들은 못 해도 십대 후반쯤엔 다 겪었을 경험이 홀로 유별난 세상을 사느라 고생했던 그에게는 부재한 탓이었다. 거기에 특이한 체질까지 더해지니, 아츠무는 마치 사막에서 어렵사리 찾은 오아시스를 사수하듯 제 연인을 과하게 싸고돌았다. 그러나 스스로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진짜 후회하지 말고 내 말 똑디 들어라. 니 그 억지를 지금까지 다 들어준 것만 해도 키타 상은 지쳐있을 거다.”
“뭐라노!”
“받아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같이 좀만 연락 안 되면 바로 찾아가고 다른 사람이랑 둘이 있으면 아주 생난리를 쳐대는 데 그걸 우예 참고 사노.”
아츠무는 짜증스럽게 가방을 던져놓으며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오늘도 키타와 그 문제로 부딪히고 온걸 대체 어찌 알았는지, 아주 귀신같이 짚어내는 게 너무나 얄미웠다. 사랑하면 매 순간 함께 하고 싶고 그런 거제. 다들 그런 거 아이가?
“아 몰라! 내는 다 필요 없고 키타 상만 있으믄 된단 말이다!”
“진짜 답 없는 새끼.”
사실 오사무는 스나에게 들어 키타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아츠무가 자꾸 찾아가고 쉴 새 없이 연락해대는 바람에 과제도 과 모임도 힘들게 하고 있다더라.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츠무는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마냥 즐겁고 설레기만 하던 만남이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한번 삐거덕거리기 시작한 태엽이 계속해서 마모되며 금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빠르게 불타올랐던 만큼 부작용 또한 빠르게 찾아온 걸까. 모든 것이 처음인 아츠무에게는 그저 이 상황이 어렵고 낯설 뿐이었다.
더 괴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타에게 제 사랑을 들이붓는 것을, 도저히 멈추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
또다시 키타의 연락이 늦어지고 있었다. 겨울 학기의 마지막 기말고사가 진행되는 중이라 바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하필 다른 학번이라 과목이 겹치는 것도 몇 없어 같이 공부하지도 못했다. 키타가 그의 동기들과 팀 과제를 하고 시험공부를 하는 내내, 아츠무는 타오르는 질투를 느끼며 안절부절못하고 끊임없이 연락했다.
“적당히 좀 해라. 진짜 분리불안 있어?”
“오늘 아카기 선배랑 둘만 과제 한다 캤다. 둘이 좀 친하나.”
스나는 기어코 파국으로 치달으려는 아츠무를 보며 혀를 찼다. 애인의 숨통을 틀어막을 정도로 맹목적이고 비틀린 사랑이 안타까우면서도 답답했다. 요즘 들어 키타의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인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과 내에 없었다. 오직 아츠무만 몰랐다. 둘의 다시 없을 것만 같던 운명적인 사랑이, 이런 식으로 변질될 거라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안 되겠다. 잠만 갔다 올란다.”
“야. 진짜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절대 가지 마라.”
“어제도 키타 상 과제 하느라 얼굴 못 봤다이가. 잠깐만 보고 올게, 여 있어라.”
“난 분명히 말했다. 가지 말라고.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어.”
“...다녀올게.”
아츠무는 끝내 동아리방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스나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은 술과 함께하겠네. 끔찍한 밤을 함께 지새워 줄 의리 정돈 있는지라, 그는 미리 과제를 끝내두기 위해 급히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헐레벌떡 뛰어오느라 가쁜 숨을 몰아쉰 아츠무는 3-A 강의실 앞에 서서 이마에 맺힌 땀을 한 번 훔쳐냈다. 작게 난 유리창 안으로 들여다보니 수업이 끝난 빈 강의실에 키타와 아카기 둘만 남아 과제를 하고 있었다. 넓디넓은 강의실에 오로지 둘만 있는 것을 확인하고 차오르는 질투를 삼켜낸 그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 키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카기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며 노트북을 두드리던 키타가 별안간 울린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발신자가 아츠무임을 확인한 그가 아카기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후 전화를 받았다. 아카기는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있었다.
“어. 무슨 일이고.”
“키타 상. 와 연락이 안됩니꺼….”
“아…. 라인 했나. 미안타 과제 하느라 못 봤다.”
그게 니가 미안할 일이가. 원치 않게 전화 내용을 엿들은 아카기가 키타에게 핀잔을 주며 한숨을 쉬었다. 아츠무는 그것을 바라보며 울컥 억울함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내한테 키타 상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믄서.
“지금 잠깐 볼 수 있을까예.”
“내 지금 과제 중인데.”
“진짜 잠깐만요.”
“...어딘데.”
키타 상 있는 강의실 앞이요. 기다렸다는 듯 나온 대답에 화들짝 놀란 키타가 고개를 돌려 강의실 문을 바라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인영이 비쳤다. 잠시 침묵하던 키타는 이내 알았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 후 아카기와 무언가 대화를 나눈 그가 가방을 챙겨 들고 강의실을 나섰다.
“키타 상!”
하루 만에 보는 얼굴에 아츠무는 참을 수 없는 기쁨을 내비치며 키타를 끌어안았다. 누구에게는 ‘고작’ 하루일 수도 있겠지만 아츠무에게는 1년 같던 하루였다. 키타는 얌전히 안긴 체 그의 등을 도닥여 주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일단 자리를 좀 옮길까.”
아츠무는 키타의 목소리가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마냥 좋아하며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체대 건물 뒤편에 자리한 농구장엔 강의가 모두 끝난 어둑한 밤이라 그런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뒤돌아 아츠무를 바라본 키타가 입을 열었다.
“츠무야, 이래 불쑥불쑥 말도 없이 찾아오지 말라고 했제. 저번 주에도 우리 이걸로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치만, 키타 상 연락이 안 와서….”
“연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니 연애 가치관이니까 내도 이해한다. 근데 오늘 내가 아카기랑 단둘이서만 있던 게 아니었어도 이래 무작정 찾아왔을 거가.”
다른 사람‘들’과 있는 것도 물론 질투가 나지만 단둘이, 그것도 ‘아카기’와 함께 있다는 것에 더 과하게 불안을 느낀 것은 맞았다. 아츠무는 지난번에도 이 문제로 질투를 하며 키타를 몰아세운 적이 있었다.
“그치만 키타 상이 그 선배랑 단둘이 있는 게 싫단 말입니더!”
“내가 많이 못 해줬나. 내가 니한테 이렇게까지 믿음을 못 준거가.”
“그런 게 아이라…!”
“그럼, 와 내를 못 믿는데.”
이제까지의 다툼과는 사뭇 다른 흐름이었다. 보통 아츠무가 투정을 부리고 서운해하면 키타가 차분히 그를 달래고 타협하며 대화를 풀어나갔었다. 그런데 오늘은 키타가 피곤한 얼굴로 그에게 묻고 있었다. 그를 못 믿는 것이냐고.
“그게, 그게 아이고, 저는 그냥…. 키타 상이 너무 좋은데 그게 주체가 안 돼서…. 매 순간 키타 상이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었을 뿐입니더….”
“알제. 내도 니 많이 좋아하고, 같이 있고 싶다.”
“그라믄-”
“그런데, 가끔 지칠 때가 있다. 니가 날 좋아해서 그러는 건 아는데, 그게 내 숨을 막히게 할 때가 있다.”
우예 사람이 사랑만 하며 사노. 키타의 마지막 말에 아츠무의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그는 지금 제 귀로 들어온 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라 뇌가 한 박자씩 느리게 작동했다. 어, 어어…. 얼어버린 그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입술만 뻐끔거리고 있자,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키타가 이어 말했다.
“집착과 구속은 건강한 사랑이 아이다. 니는 내를 속박하고 너를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하는 인형으로 만들고 싶은 거가.”
아츠무의 심장이 철렁하고 땅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하는데. 하다못해 아니라고 고개라도 저어야 하는데. 형체를 갖추지 못한 말들은 자꾸만 공중으로 흩어졌고, 몸은 완전히 굳어버려 움직이질 않았다. 그런 그를 향해 키타가 붉어진 눈을 휘며 애달프게 웃어 보였다.
“츠무야.”
아츠무는 뜨거운 불을 삼킨 듯 아려오는 목구멍을 억지로 열어내며, 볼썽사납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애써 대답했다.
“...네.”
속절없이 떨리는 황동 빛 동공을 바라보며, 키타는 끝내 그 또한 꺼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아프게 건넸다.
“우리…. 시간을 좀 가지는 게 좋을 것 같다.”
“키, 키타상…!”
“잠깐, 헤어져 있을까.”
아- 아아-
그 순간, 아츠무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의식하지도 못한 새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믿고 싶지 않아 발작적으로 고개를 마구 휘저은 아츠무가 손을 뻗어 키타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키타는 여전히 다정한 손길로 그의 팔을 물렸고, 그에게서 멀어지듯 떨어졌다. 그렇게 뒤로 물러나는 키타 또한 동그란 눈매 가득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발갛게 물든 눈가에서 떨어진 그의 눈물이, 아츠무의 가슴에 시리게 박혀 들었다.
결국, 사랑이 과해서 독이 되었다. 가뭄 속에서 만난 단비 같아서, 너무나 소중하고 유일한 사람이라 놓칠 수 없다는 마음만 앞서 그도 모르게 집착했다. 과한 사랑은 불안과 만나 집착이 되고 집착은 구속이 되었다. 그는 키타가 입을 열어 이별을 고하기 전까진 스스로가 어떤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키타를 옭아매며 속박하려 했다. 그리고 그가 모르고 있던 사이에 키타는 지쳐가고 있었다. 놀랍게도 아츠무는 키타가 지금껏 참고 또 참아오고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주변에서 걱정하듯 건네오던 충고들을 이해 못 하고 넘겨버린 탓이었다. 첫 경험이라 한들, 무지는 죄였다.
너무나 미안했다. 그를 울게 만든 스스로가 미워져서 더는 붙잡지도 못했다. 펑펑 우는 아츠무를 그 자리에 두고, 그렇게 키타가 떠나갔다. 아츠무는 공허한 눈으로 키타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그가 걸어가는 길에는 잎을 전부 잃어버린 황량한 나뭇가지들만이 가득했다. 겨울, 색이 사라지는 계절.
겨울은 따듯한 생기를 잃었고, 아츠무의 세상은 다시 색을 잃었다.
다시, 봄❀ BGM (Daydreaming - jack&jack)
오사무는 방학 내도록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아츠무를 걱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츠무가 다시 색을 보지 못하게 된 지 두 달이 흘렀다. 거의 평생을 무채색 속에서 살아왔음에도 이미 한번 맛본 색깔들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아츠무는 제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색상 인식 불능’이 심리적인 부분에서 좌우된다는 것을 이번 일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여전히 키타를 향한 사랑은 죽지를 않았지만,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상실감이 그에게서 다시 색을 앗아간 듯했다.
“곧 개강인데 계속 이라고 있을 거가.”
“니는 내 마음 모린다.”
“그라믄 키타 상한테 가서 빌기라도 하든가.”
“내가 무슨 자격으로.”
아츠무는 제가 다시 색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오직 스나와 가족들에게만 알렸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여전히 색이 보이는 척 굴며 키타에게 이 비극적인 소식이 들어가지 않게 했다. 혹여라도 그가 동정심에 혹은 죄책감에 아츠무를 다시 받아주게 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떠밀려서가 아닌, 키타 스스로가 직접 자신을 찾아주길 바랐다. 설령 평생 오지 않을 기약 없는 기다림일지라도. 이제는 정말 제대로 된 사랑을 하기 위해, 그는 오로지 키타의 선택을 기다릴 뿐이었다.
가라앉은 눈을 들어 올린 아츠무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더는 눈이 오지 않았고, 나뭇가지엔 작달막한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어느새 꽤나 따듯해진 온도를 느끼며 그는 하염없이 바깥 풍경만을 바라보았다. 검은색과 회색, 흰색으로 가득한 세상이, 키타를 떠올리게 했다.
그것 하나만이 아츠무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
벚꽃이 만개한 교정을 거닐 날이 훌쩍 다가왔다. 벌써 아츠무는 3학년이 되어 학교 내에서 나름 고학번 반열에 끼게 되었고, 이제 수강 신청쯤은 껌이라 원하는 대로 신청하는 데에 성공했다. 드디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개강 날이었다.
“여어- 잘 못 지냈을 아츠무. 잘 지냈냐?”
“못 지냈을 거 알면서 와 물어보는데.”
“음, 확인 사살?”
“...이딴 것도 친구라고.”
“이딴 거라니. 피 같은 친구 조언 무시한 건 너고, 나는 그런 너와 술로 밤을 지새워 준 의리 넘치는 친구지.”
맞는 말이라 아츠무는 끙- 신음을 내며 입을 다물었다. 더럽게 얄밉지만 틀린 거 하나 없어, 한 대 갈기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애써 '참을 인' 자를 새긴 그는 내심 강의실 안을 둘러보며 보고 싶었던 이의 자취를 찾아보았다.
“미리 말해주는데 키타 상 이 강의 안 듣는다.”
“...누가 뭐라 캤나.”
“아니 뭐- 애타게 주인을 찾는 강아지같이 굴기에.”
아츠무는 입술을 비죽이며 고개를 팩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하여간 티가 나도 좀 모르는 척해주는 매너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놈이었다. 곧이어 교수님이 들어와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했다. 그는 언제 들어도 지루한 목소리를 적당히 스킵하며 이 건물 어딘가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키타를 떠올렸다. 조금 찌질해 보일지라도 부러 커플 신발을 신고 나올 정도로 제 마음은 여전하다는 걸, 최대한 티 안 나게 알려주고 싶었다. 음…. 티가 안 나진 않으려나?
그때, 수업을 열심히 듣는 척 공책에 무언갈 적던 스나가 아츠무에게 작은 쪽지 하나를 밀어 보냈다. 아무것도 없는 책상 위에 초라하게 올려진 쪽지를 어이없이 바라보던 아츠무가 짜게 식은 얼굴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쪽지는 볼품 없는 겉모습과 달리 엄청난 내용을 품고 있었다.
[키타 상 오늘 수업 ‘스포츠 경영학’. 옆 건물 2-B 강의실. 2시에 끝남.]
눈을 휘둥그렇게 뜬 아츠무가 멍하니 눈꺼풀을 몇 번 꿈뻑였다. 이거 진짜가. 입 모양만으로 물어온 질문에 스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친구 좋은 게 뭐냐. 시크하게 틱 뱉은 말이 어찌나 멋있던지. 좀 전까지 얄밉고 짜증 났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쿵쿵 뛰는 심장을 느끼며 아츠무는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작 1시. 교수님이 양심을 챙겨 수업을 조금 일찍 끝내주신다면 키타를 찾아갈 시간이 아슬하게나마 될 듯했다.
물론 모든 교수님들이 그렇듯, 이번에도 여지없이 교수님은 양심을 내다 버리셨다.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풀강을 다 채운 바람에, 아츠무는 다리를 달달달 떨다가 2시 반이 되어서야 강의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아씨! 키타 상 집에 가셨으면 우야지! 멀리서라도 얼굴 보고 싶은데!”
“내가 오늘 시간표 물어본 이유 아실 테니까, 키타 상도 네가 보고 싶었으면 기다리고 계시겠지.”
남 일이라고 속 편한 소리 하고 앉아있다. 아츠무는 여태 연락이 없는 이유가 뭐겠냐며, 두 번 죽이지 말고 꺼지라는 막말을 퍼부어 준 뒤 홀로 달음박질쳐 옆 건물로 건너갔다. 오늘의 목표는 딱 하나였다. 멀리서라도 얼굴 한 번 보기. 지난 방학 내내 보고 싶어서 죽을 뻔했으므로, 욕심 없이 딱 얼굴 한 번만 보고 조용히 사라져줄 생각이었다. 뭐, 그러는 김에 키타 상도 의도치 않게 내를 보게 되고, 내 커플 신발도 알아보면 일석이조인 거제.
급히 달려 도착한 2-B 강의실 앞에서 아츠무는 한차례 심호흡을 했다. 없어도 실망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한 아츠무는 이미 늦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빼꼼, 고개를 내밀어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 갔네.”
빈 강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예상한 결과였음에도 커다란 탈력감이 덮쳐왔다. 아마 자신도 모르게 스나의 말을 듣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내 주제에 무슨 기대를 했노. 정신 차리라, 미야 아츠무. 두 손으로 제 뺨을 한번 철썩 내리친 아츠무는 다시 씩씩하게 고개를 들고 건물 밖으로 나섰다. 진짜 속까지 괜찮은 건 아니었지만 애써 스스로를 달랬다. 개강은 이제 막 했고 아직 기회는 많다. 괜히 욕심내다가 똑같은 실수를 저질러선 안 되었다.
그때, 다시 본래 건물로 들어가려던 아츠무의 앞을 난데없이 불쑥 나타난 누군가가 막아섰다. 미처 눈치채지 못해 그 남자와 부딪힐뻔한 아츠무는 습관적으로 사과 인사를 건네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엔, 좀 전까지 애타게 찾아다녔던 이가 차분한 낯으로 그를 보며 서 있었다.
아츠무의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너무나 놀라 되려 아무런 반응도 나오질 않았다. 그저 꿈결을 헤매듯 멍한 눈으로 제 앞에 있는 남자를 확인하고 또 확인할 뿐이었다. 숨조차 멈추어버린 그에게, 오랜만에 마주한 키타가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나.”
아츠무는 여전히 비현실감에 휩싸여 잠시간 침묵하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그, 어, 키, 키타 상, 저, 그…!”
“잘 지냈냐는 질문이 그래 대답하기 어려운 거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지친 모습과 달리, 지금의 키타는 단정한 얼굴로 옅게 웃으며 아츠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좋은 신호인 건지 아니면 완벽히 정리된 사람의 반응인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아 아츠무는 안절부절못하며 정신없이 손을 떨었다. 여전히 대답 없는 그를 보며 키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부터 대답하자면, 내는 잘 못 지냈다.”
“......”
“그리고 조금 전까진, 니가 먼저 집에 간 줄 알고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예…? 얼떨떨한 얼굴로 멍청히 되묻는 아츠무를 향해 키타가 부드러이 웃어주었다. 아츠무의 새하얘진 머리로는 현재 상황을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혹시 나 아직 강의실에서 자고 있나. 이거 꿈인가. 그는 떠듬떠듬 입을 열어 이상한 문장을 만들어냈다.
“키타 상이, 이거, 꿈, 저를, 아니, 왜, 그러니까, 기다린, 어어….”
“꿈 아이고. 니 기다린 거 맞다. 할 말이 있으니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아츠무는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못 하고 그저 머리가 아플 만큼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키타의 입에서 나올 말이 완전한 이별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 천국에 당도한 기분이었다. 키타는 끝을 모르고 끄덕이는 아츠무의 양 뺨을 붙잡아 고정하곤 달래듯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그리곤 진정된 아츠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있제- 내가 많이 생각해 봤는데.”
“예, 예!”
“역시 내도 니 없으니까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거 같더라.”
“.......”
수많은 상상 속에서 들어왔으나 현실에서도 들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그에게로 따스히 내려앉았다. 아츠무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하염없이 키타의 얼굴만 내려다보았다. 차마 손을 뻗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두커니 서서 애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게, 꼭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때의 모습 같았다. 그런 아츠무를 보며 마음이 아파진 키타가 직접 그의 손을 쥐고 끌어당겼다.
“츠무야, 내 많이 기다렸나.”
그걸, 말이라고…. 심장을 꺼내서 보여주고 싶을 만큼 절절히 기다렸다. 아츠무는 울컥 치미는 감정에 꽉 막힌 목을 추스르느라 한참 뒤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죽도록 기다렸습니더.”
“내 안 잊었나.”
“제가 키타 상을, 어떻게 잊어요.”
“맞나.”
키타가 여전히 떨리는 아츠무의 두 손을 꼭 쥐어 온기를 나눠주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다시 무채색의 세상을 살게 되었지만, 여전히 똑같은 그의 머리칼과 인식하진 못해도 이미 알고 있는 붉은 입술이 예쁘게 휘어지는 것만큼은 생생하게 다가왔다. 아츠무는 북받치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간절하게 말을 꺼내었다.
“있지요 키타 상- 제가, 제가 진짜 잘할게요. 앞으로는 절대 키타 상 힘들게 안 하고, 키타 상 존중하고, 배려하고, 평생 사랑하면서 받들어 모실 겁니더. 그러니까 저 다시 받아주면 안 돼요…?”
팔자로 처진 눈썹과 그렁그렁한 눈이 더없이 애처로웠다. 그 모양새가 꼭 주인에게 가고 싶어 낑낑대는 강아지를 보는 것만 같아 키타는 푸스스-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사뿐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다시는 서로를 잃지 말자.”
그 말을 시작으로 아츠무의 세상에 다시 색이 찾아들었다. 온 땅과 나무를 물들인 연한 분홍빛이 눈을 아프게 찔러 들어왔다. 눈물을 뚝뚝 떨구며 사랑하는 이를 다시금 품에 안았다. 아츠무는 그제서야 직접 벚꽃의 색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진짜 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맞이한 봄은 눈이 시리게 아름다웠다. 이제 다시는 잃지 않을, 아름다운 색으로 가득한 그의 세상이었다.